2009/10/16 15:33

밀양 생각

마지막 컷은 "비밀의 볕"으로 가득했지만
내 시선은 때글은 세제통을 이고 있는 남루한 대지에 멈췄다.

이창동이 "현실"에 예민한 작가임은 누구나 다 안다.
이창동의 작품들이 긴 시간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건,
그가 작품들 속에 배치해 놓은 "현실"이라는 것들이, 내게는 너무나 익숙해
오히려 나 자신의 한 부분임을 쉽게 부인하게 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.

내게 이창동이 놀라운 작가인 이유는  
아름다움에 관한 익히 알려진 이론들로는 정당화하기 어려운 현실의 모습들이
이 시대의 깊고 보편적인 문제들을 드러내는 데엔
오히려 매우 효과적인 통로일 수 있다는 걸
그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.

"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" 한다지만,  
기실 기독교는 이성과 논리의 토대 위에서 발전해 왔으며
서양의 정신은 믿음과 증거 사이의 길항을 한 축으로 전개 되어왔다.

긴장과 고민이 거세되고,
열광과 축복만 가득한 한국 기독교의 현실은
"용서와 구원"이라는 "하나님의 가르침 중 가장 지키기 어려운" 주제를
떠받치기엔 너무 빈약해 보인다.
카센터의 송강호보다는 아우슈비츠의 아드리안 브로디가
전도연의 붕괴를 주시하는 사람으로 더 어울리지 않는가?

그런데
"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"을 부르며
애매하게 곧추어진 권사님들의 손 동작을 보면서 나는
깊은 상처입은 신애의 신앙을 향한 쇄도와
위태로움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.

이창동이 여기서 다루는 문제는
"한국 보수 기독교"의 범위를 훌쩍 넘어선다.
이는 조엘 오스틴이 래리 킹에게 거룩한 톤으로
"I don't know"라고 대답한 당대의 근원적 질문들 중 하나일 터이다.

2009년 현재
우리는 문제의 지형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?